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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자동차 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좀 넘었다. 돌아와서 이런저런 일로 공연히 마음이 바쁘고 몸이 게을러져 컴퓨터 앞에 차분히 앉을 시간을 갖지 못했다. 더 이상 미루면 여행의 기억이 점점 흐려질 것 같아 이제라도 여행을 되돌아보며 기록을 남긴다.

 

아내와 함께하는 자동차 여행은 꽤 오랜만이었다. 2년 전 알래스카 하이웨이 여행 후 처음이다. 이번 일정은 5일 동안 아이다호 주의 온천을 몇 군데 가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틀 동안 오리건 주의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과 태평양 연안의 해변 몇 군데를 들러 보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 날씨가 화창하다. 벨뷰를 거쳐 I-90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쌩쌩 신나게 달리며 보니 곳곳에 교통경찰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오늘 왜 이렇게 경찰이 많지?”

“그러니까 자기도 조심해.”

아내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경찰 오토바이가 경광등을 켜고 내 뒤에 따라붙는다. 경찰이 차를 세우라고 손짓한다. 아, 이게 뭐야. 내가 방심했구나. 도로 옆에 차를 세웠다. 시속 70마일 지역에서 83마일로 과속했단다. 할 말이 없다. 전에 내 친구는 과속으로 걸렸을 때 경찰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 주어 고맙다고 했더니 그냥 보내 주었다는데, 나는 낯이 간지러워 차마 그 말이 안 나온다. 달라는 대로 면허증과 등록증을 건네주고 얌전히 처분만 기다린다. 잠시 후 경찰이 13마일 초과를 5마일로 깎아 주었다며 범칙금 통지서를 건네준다. 깎아도 벌금이 105불이다. 게다가 3년간 자동차보험료가 할증될 것까지 감안하면 수백 불 손해 보게 생겼다. 여행 초장부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통지서를 받아 들고 다시 차를 달린다. 기분이 찜찜하고 짜증이 난다. 아내가 내 팔뚝을 때리며 한 마디 한다.

“길에 경찰이 깔렸다고 자기 입으로 얘기해 놓고도 과속을 해? 도대체 왜 그래?”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랬지? 과속이 습관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아버지날인데, 아까 경찰에게 아버지날 축하한다고 한 마디 했으면 혹시 봐 주지 않았을까? 난 그럴 때 왜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오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에 들떴던 여행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한동안 그러고 가다가 그래 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얼핏 든다. 이왕 나선 여행인데 기분 좋게 가는 게 낫다. 일부러 과속 딱지를 마음에서 지워 버리려 애쓴다.

 

캐스케이드산맥을 넘어 워싱턴 주 동부에 접어드니 풍경이 달라졌다. 넓은 대평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완만한 구릉들이 유유히 물결치는 바다의 놀처럼 오르락내리락 이어진다. 그 넓은 구릉과 평원이 혹은 목초지가 되고 혹은 밀밭이 되어 짙푸른 녹색으로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며 파란 하늘과 빛깔 경쟁을 한다. 윈도우즈 컴퓨터의 바탕화면에서 본 바로 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차창을 스친다. 편평한 논밭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언덕의 비탈들이 넘실넘실 그대로 밀밭이 되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집을 출발한 지 거의 다섯 시간 만에 스텝토 뷰트(Steptoe Butte) 주립공원에 도착했다. 스텝토는 용암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산이라는 뜻이란다. 뷰트 역시 혼자 불쑥 솟은 산을 가리킨다. 온통 밀밭으로 뒤덮인 평원에 작은 산이 그 이름처럼 불쑥 솟아 있다. 그 산을 몇 바퀴 뱅뱅 돌아 놓인 찻길을 타고 정상까지 올랐다. 사방에 시야가 탁 트인다. 차에서 내려 잠시 돌아 보는데 백인 영감님이 슬슬 다가와 말을 붙인다. 저 아래 멀리 보이는 농가에 혼자 산단다. 보아하니 사람이 그리운 이 영감님은 일요일에 이곳에 올라와 사람들 만나는 게 낙인가 보다. 내가 아이다호 온천 몇 곳을 유람할 거라고 하니 가는 길에 배를 타고 헬즈 캐니언(Hells Canyon)을 꼭 구경하라고 추천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일정엔 그럴 여유가 없다. 예전에 이 꼭대기에 호텔이 하나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단다. 사방 밀밭에 둘러싸여 고립된 언덕 위에 호텔이라니, 좀 생뚱맞다. 화재가 아니었어도 결국 망할 운명이 아니었을까?

 

공원을 떠나 다시 남동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아이다호 주에 들어섰다. 아이다호는 미국 제일의 감자 산지로 유명하다. 미국의 감자바위라고나 할까? 국도와 지방도를 달리며 보는 아이다호는 매우 아름다웠다. 초원과 밀밭, 황무지가 번갈아 나타나는 가운데 거기 어우러진 강과 부드러운 능선의 산언덕이 평화로운 경치를 만든다. 마치 길 자체가 공원 같은 느낌이다. 아이다호에 대해서는 감자 밖에 아는 게 없었는데, 오늘 조금이나마 그 진면목을 엿본 것 같다.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고 성급히 판단하면 안 된다. 특히 미국이란 나라는 워낙 크다 보니 웬만해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어렵고, 그런 만큼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8시경, 맥콜(McCall)이라는 작은 관광도시에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했다. 집보다 한 시간 앞선 시차를 감안하면 출발한지 10시간이 조금 넘은 셈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총 520마일이다.

 

방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먹고 아내와 산책을 나섰는데, 길에서 모기가 유독 나를 반기며 달려든다. 결국 얼굴과 팔, 어깨에 여남은 군데 강제로 모기에게 키스를 당하고는 중도에 산책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온천 탐방을 시작했다. 처음 들른 곳은 버그도프(Burgdorf) 온천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와 북쪽으로 1시간가량 떨어진 온천으로 향했다. 중간에 공사로 길을 막아 놓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결국 먼 길을 돌아서 도착했다. 먼지 날리는 맨땅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소 초라해 보이는 사무실 건물에 들어섰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젊은 백인 남자가 부인과 함께 우리를 맞아준다. 입장료는 일 인당 10불씩이란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길래 시애틀이라고 하니 반가워한다. 자기네도 시애틀에서 살다가 이곳 온천을 인수해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단다. 젊은 도시 부부가 한적한 시골로 귀촌한 이유가 문득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아무쪼록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온천은 수영장 정도의 큰 풀 하나와 그 옆에 가족탕 정도의 작은 탕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큰 풀의 수온은 38도, 작은 곳은 45도 정도란다. 온천수는 먼저 작은 탕으로 흘러나와 그곳에서 큰 풀로 통하게 되어있다. 작은 탕에는 마른 나무껍질 등으로 삼면을 가린 벽에 지붕을 얹어 그늘을 만들어 놓은 반면 큰 풀은 그대로 햇볕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수온이 높은 작은 탕을 주로 이용했다. 유황 냄새가 적당히 나는 따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심신이 다 평온해진다. 단지 내 언덕에는 방갈로가 몇 채 있고, 투숙객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이런 곳에 며칠 있으면 말 그대로 완전한 휴식이 될 것 같다. 십대 딸을 데리고 온 백인 남자가 가까이 오길래 말을 걸어 보았다. 우리처럼 온천을 좋아해 여기저기 많이 다녀 보았단다. 아이다호 온천 중 어디를 제일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딸과 잠깐 의논하더니 골드포크(Goldfork)와 라바 (Lava) 온천이라고 입을 맞춘다. 다행히 둘 다 우리 일정에 들어 있는 곳이다. 골드포크는 여기서 가까워 우리가 오후에 들를 곳이고 라바는 모레 들를 예정이다.

 

오전 두어 시간을 온천에서 보내고 다시 맥콜로 돌아와 호숫가에 있는 레거시(Legac) 공원을 잠시 거닐며 구경했다. 호반에 산책로와 식당 등 편의 시설을 잘 개발해 놓았다. 호숫물이 꽤 찬 편인데도 아이들이 물속에서 뛰어논다. 우리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근처 멕시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멕시코 며느리를 본 이후로 멕시코 식당을 자주 찾게 되는 건 무슨 조화인지.

 

오후에 골드포크 온천을 향해 맥콜을 출발해 남쪽으로 향했다. 30분 정도 지방도를 달린 후 빠져나와 비포장도로에 들어섰다. 길 옆 나무에 손으로 쓴 안내문이 보인다. 이런, 한 달 정도 온천을 닫고 정비 중이란다. 어제 홈페이지에도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불친절이 다 있나? 잠시 차를 세우고 궁리해 보았지만 문을 닫고 공사 중이라는 데야 별 뾰족한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일찌감치 오늘 머물 숙소로 향했다. 예상 못 한 상황 때문에 예정보다 이른 4시경에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인터넷으로 골드포크 온천 페이스 북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도 휴업 안내는 없고, 우리처럼 헛걸음질한 사람들의 불만만 잔뜩 올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텍사스에서 왔다가 허탕친 사람도 있다. 텍사스라면 나보다 네다섯 배는 더 먼 거리다. 그 사람의 불운이 나를 다소 위안해 준다.

(2019.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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