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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은 하루 종일 라바 핫스프링스 시내를 벗어나지 않고 지냈다. 시내에 온천욕을 할 수 있는 대중 시설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슬라이드 등 물놀이를 하는 가족용 수영장이고 다른 하나는 노천온천탕이다. 우리는 온천탕을 선택했다. 숙소인 홈 호텔은 시내 중심 도로의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고, 거기서 시내 반대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온천탕이 있다. 9시 반경 숙소를 나와 온천으로 향했다. 좁은 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온천에 도착했다. 간판에 적힌 공식 명칭이 ‘Lava Hot Springs Foundation World Famous Hot Pools’란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나는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이 사람들 허풍이 꽤 심한 모양이다. 하기야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월드’는 우리와 좀 다른 면이 있는 것도 같다. ‘월드’가 반드시 ‘국제적’인 건 아니다. ‘월드 시리즈’ 야구는 미국 팀끼리만의 경기일 뿐이니까. 나라 바깥의 세계와는 담쌓고 지내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미국엔 의외로 많다. 그 ‘우물’이 워낙 크다 보니 그게 우물인 줄 모를 뿐.

 

온천은 현대적으로 잘 꾸며져 있다. 시설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어 첫인상이 좋다. 시설 안에는 모두 다섯 개의 큼지막한 탕이 있다. 탕마다 수온이 다르다. 가장 뜨거운 탕에는 그늘이 없어 햇볕이 따갑다. 우리는 그늘이 있는 탕 중 가장 수온이 높은 곳으로 정했다. 우리 외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들어왔다가도 금방 다른 탕으로 옮겨 간다. 덕분에 넓은 탕을 아내와 둘이 차지하고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긴다. 눈앞에는 산과 절벽이 있고 머리 위에는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다. 탁 트인 경치를 보며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앉아 있으니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다. 이곳 온천은 유황천이 아닌 게 좀 아쉽다. 아무래도 유황 냄새가 나야 온천 하는 맛이 더 나는데.

 

오늘은 평일이라 입장권을 사면 하루 종일 자유롭게 온천을 드나들 수 있다. 우리는 두 시간 넘게 탕 안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 온천을 나왔다. 원래 계획은 오후에 다른 온천을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그곳이 이곳보다 나을 게 없을 것 같다. 굳이 왕복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소비하고 또 입장료도 새로 낼 필요 없이 그냥 여기 있는 게 낫겠다. 아내와 나는 가까이 있는 태국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고, 산책을 겸해 시내 구경을 했다. 도시를 돌아나가는 강에서 래프팅을 하기 위해 여럿이 힘을 합해 큼지막한 고무 튜브를 들고 가는 청소년들이 눈에 띈다. 라바 핫스프링스는 인구가 오백 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다. 시내 중심부라야 시가지 끝에서 끝까지 거리가 1Km 정도인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래도 관광지답게 식당은 여러 개가 있고, 그 외에도 생활에 필요한 상점들도 구색을 갖추고 있다. 나 같은 관광객이 없으면 여기 있는 상점 주인들은 서로 자기끼리 손님이 되어 물건을 사고팔아야 할 거라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동네 구멍가게만 한 도서관이 정겨워 보인다.

 

저녁까지 숙소에서 쉬다가 느지막이 다시 온천을 하러 갔다. 여기가 시골이니 밤에 혹시 은하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낮의 따가운 햇볕이 사라졌으니 이번엔 제일 뜨거운 탕으로 했다. 혼자 탕에 들락날락하며 책을 읽는 젊은 백인 여자가 우리만큼 끈질기게 자리를 지킨다. 해가 넘어가고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누가 더 오래 있는지 우리와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드디어 그 여자가 갔다. 온천의 조명 때문에 밤하늘에 별이 기대한 만큼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은 땅 위에서 온천수에 담그고 마음은 하늘 위에서 은하수에 띄워보려던 내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11시에 문을 닫는다는 안내 방송을 몇 번 듣고야 우리도 자리를 떴다.

 

다음날, 이틀을 지낸 호텔을 나와 다시 길을 떠난다. 오늘은 이곳에서 100 마일 정도 떨어진 베어 호수(Bear Lake) 옆의 베어 레이크 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근처의 숙소에 들 예정이다. 오늘 숙소는 모텔이 아니라 에어비앤비를 통한 민박인데, 가기 전에 집 주인이 근방의 구경할 만한 곳으로 블루밍턴 호수를 추천해 주었다. 괜찮은 곳 같아서 내비게이션 기기에 위치를 입력하고 우선 그곳으로 향했다.

 

큰 길을 벗어난 길이 곧 비포장으로 변했다. 움푹 파인 웅덩이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내비게이션 안내만 믿고 가라는 대로 차를 몰고 간다. 그런데 산으로 들어가면서 길이 점차 좁아지고 험해진다. 설마 엉뚱한 길로 가는 건 아니겠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지만 일단 그냥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길이 좁아 차를 되돌릴 공간도 없다. 불안한 심정으로 잔뜩 긴장한 채 그렇게 한참을 갔다. 길이 점점 더 험해진다. 이제는 튀어나온 돌이 차 바닥에 닿기도 한다. 되돌릴 수가 없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러다 전화도 안 통하는 산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고립되지나 않을까 마음이 점점 불안해진다. 갑자기 차 바닥에서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내려서 살펴본다. 차 하체의 양쪽 앞 바퀴 사이를 덮고 있는 플라스틱 판의 앞 쪽이 떨어져 땅에 끌리고 있다. 간신히 손으로 대충 끼워 넣었다. 험한 길을 다시 간다. 몹시 긴장된다. 아내는 옆에서 걱정이 되어 울상이다.

 

갈림길이 나온다. 한 쪽은 급경사에 길 중간이 움푹 패어져 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바로 그 길로 가라고 나를 떠민다. 갈 수 있을까? 10미터 정도 올라가 본다. 경사가 더 심해지고 바위 같은 돌이 튀어나와 본격적인 ATV 차량이나 올라갈 것 같다. 차에서 내려 걸어 오르며 길을 살펴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차고가 낮은 승용차로는 전혀 갈 수 없는 길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게 아깝지만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차를 후진시켰다. 좁고 험한 길에서 후진하기가 쉽지 않다. 길의 벌어진 틈새에 바퀴가 빠지지 않는지, 튀어나온 바위에 차체가 닿지 않을지. 아내가 내려서 길을 보아주는데도 진땀이 난다. 뒤로 가다 다시 앞으로 가기를 반복하며 간신히 갈림길까지 차를 빼냈다. 그나마 갈림길이 있어 차를 돌릴 공간이 생긴 게 다행이다. 겨우 차를 돌려 방금 지나온 그 지옥 같은 길을 되짚어 나온다. 차가 너무 무리한 것 같아 걱정스럽다. 나를 이렇게 고생시킨 내비게이션을 원망해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다시 큰 길로 나오니 포장도로의 고마움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매일 당연히 여기고 별생각 없이 다니는 길이 사실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결국 블루밍턴 호수는 포기하고 베어 호수로 향한다.

베어 호수는 굉장히 큰 호수로 아이다호 주와 유타 주에 걸쳐 있다. 차로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데 50분 정도 걸린다. 호수 물이 비취색인 게 특이하다. 그 호수의 북동쪽 호반에 온천이 있다. 아무 간판이 없어 처음에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온천 시설이라곤 허름한 탈의실과 화장실에 스무 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콘크리트 야외 욕탕 두 개가 전부였다. 다소 실망스럽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노력이 아까워 일단 입장료를 치르고 탕에 들어갔다. 우리 외에는 백인 모자가 손님의 전부다.

 

잠시 후 직원인 젊은 백인 남자가 탕에 들어왔다. 좀 떨어진 곳에 있다가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건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한국어를 한다. 모르몬교 선교사로 부산에서 2년 정도 일했다는데, 한국어를 곧잘 한다. 한국어를 하는 미국인을 만나니 매우 반갑다.

 

온천 후 차로 호수를 한 바퀴 돌며 구경했다. 그중에 작은 마을을 지날 때 스무 마리 정도의 소 떼를 몰고 가는 카우보이들을 만났다. 소 떼가 찻길 한 쪽을 다 차지하고, 차들이 소를 피해 중앙선을 넘어 비켜간다. 그런데 카우보이들이 말 대신 ATV를 타고 있다. 현대화된 카우보이가 소 떼를 모는 모습이 이채롭다.

 

오늘 이곳으로 오는 중에 점심은 파리라는 소도시에서 먹었다. 프랑스의 수도를 본 딴 이름이다. 텍사스 주에 있는 파리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파리 텍사스’라는 영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다호 주에도 파리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어쨌든 이번 여행에 파리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된 셈이다.

 

(2019. 7. 7)

라바 온천, 물이 맑고 깨끗하다

라바 핫스프링스 시내

라바 온천 야경

베어 호수 호반의 온천

베어 호수의 비취색 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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