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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험한 산 길에서 헤매며 진이 빠진 그날은 밤에 잠자리마저 불편해 숙면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의 낡은 매트리스의 가운데 부분이 탄력을 잃고 가라앉는 바람에 자면서 자꾸 침대 안쪽으로 몸이 미끄러져 원하지 않게, 아니 원하는 이상으로 아내와 밀착해서 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뒤척임이 고스란히 전해져 깊이 잠들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어느 정도의 거리는 서로에게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그 거리가 더 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오늘로 온천은 마지막이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다시 라바 핫스프링스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이틀을 지낸 터라 친숙해 보인다. 라바 온천에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온천욕을 했다. 어제 베어 호수변의 허접했던 온천과는 여인숙과 특급호텔의 차이다.

 

두 시간 남짓 따끈한 온천에서 몸을 풀고 나니 온몸이 개운하면서도 나른하다. 배도 고프다. 시내의 이태리 식당에서 피자와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두 시간 반가량 차를 달려 아내와 내가 무릉도원이라 부르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은 몇 년 전 아내와 처음 와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곳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때, 지나는 길에 쇼쇼니 폭포의 존재를 알게 되어 찾아갔는데, 내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인도하는 바람에 그 폭포 상류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한 오붓한 마을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그 마을은 진입로부터 남다른 인상을 준다. 트윈 폴즈 (Twin Falls) 시 쇼쇼니 폴즈 로드(Shoshone Falls Road) 동쪽 끝자락, 이름이 캐니언 드라이브(Canyon Drive)로 바뀐 길이 내리막이 되는 곳에서 마을의 진입로가 시작된다. 진입로 좌우 양편에 암벽이 길을 지키듯 서 있고. 저 멀리 강 건너편에는 평원에서 아래로 깎아지른 거대한 암석 절벽이 버티고 있다. 그 절벽과 이쪽 편 절벽 사이에 스네이크 강이 고요히 흐른다. 계곡 아래 그 강을 끼고 자리 잡은 마을은 양쪽의 높다란 절벽이 세상의 소란함을 막아 주는 듯 평화롭고 아늑해 보인다.

 

마을엔 호수가 있고 그 호수와 강을 끼고 잘 관리된 녹색의 잔디밭이 보기 좋은 아담한 골프장이 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한층 더해 준다. 처음 왔을 때엔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느라 진입로를 통해 마을에 들어가 강가에까지 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유지이니 진입하지 말라는 진입로 입구의 팻말을 차마 무시하지 못하겠다. 수십억 년 전부터 있어 왔고 지금 숨 쉬는 인간이 다 죽어 사라진 후로도 오래도록 남아 있을 이 땅에 찰나의 인생을 사는 인간들이 말뚝을 박고 제 것이라 우기는 꼴이 일견 가소롭기도 하지만, 세상이 다 그런 걸 어찌하랴. 우리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길 옆 언덕에 올라 무릉도원을 내려다본다. 다시 보아도 감탄이 나온다. 대평원을 양쪽으로 갈라 놓은 거대한 계곡, 그 계곡 사이로 깎아지른 암석의 낭떠러지 아래를 흐르는 큰 강, 그 강변에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마을. 그 마을 끝에서 강 전체가 아래로 추락해 버리는 거대한 폭포.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다음 날, 아이다호 제일의 도시 보이시(Boise)에 들렀다. 보이시는 시골의 한적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인구 20만 명 규모의 도시다. 현대식 고층 건물이 밀집한 도심 바로 곁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보이시 강이 흐르고, 그 강을 따라 수많은 공원이 이어진 대규모 그린벨트가 있다. 우리는 그 공원 중 몇 개를 골라 산책을 했다. 도심에 위치한 대규모 녹지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아내는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다시 키우고 싶다고 한다. 공원들이 다 인상적이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버나딘 퀸 강변공원(Bernadine Quinn Riverside Park)과 그 주변의 공원들이었다. 강 옆에 여러 개의 호수들이 있고 그 주위에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시민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편하게 물놀이나 소풍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이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호반의 모래밭에 편한 자세로 엎드려 친구와 얘기하는 동양 아가씨들 곁을 지났다. 한국어가 들린다. 반갑다. “아, 여기 사세요?” 내가 말을 거니 아가씨가 깜짝 놀라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대학생들이란다. 내가 보이시를 부러워하니 정말 좋은 곳이라며 자랑을 한다. 그러다 겨울 날씨를 묻자 “너무 추워요. 눈이 너무 많이 와요” 두 마디로 말문이 닫힌다. 있는 동안 즐겁게 지내다 가라고 덕담을 한 마디 해 주고 헤어졌다.

 

한번 살아 보고 싶은 아름다운 보이시를 뒤로하고 동쪽으로 다시 차를 달렸다. 8시간 만에 오리건 주 크레이터 레이크(Crater Lake) 국립공원 근처 남쪽에 잠자리를 잡았다.

 

이튿날, 크레이터 레이크.

여기는 몇 년 전에 딱 한 번 와 보았을 뿐인데도 왠지 낯익다. 마치 여러 번 와 본 느낌이다. 지난번에는 날이 흐려 호수 빛깔이 우울한 회색이었다. 그게 아쉬워 이번에 아이다호에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왔다.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분화구 어귀에서 저 아래 절벽 밑 거대한 칼데라호를 내려다보는 순간 아내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아, 호수 빛이 정말 아름답다. 푸르디푸른, 눈이 아리게 푸른 코발트색 호숫물이 사방 절벽에 둘러싸인 채 햇빛에 빛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면서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다는 호수. 백두산 천지의 다섯 배 반의 면적에 최대 수심 594m라는 호수가 내 눈 아래 온몸을 숨김없이 드러내 나를 맞아준다. 그 깊고 푸른 호수 빛에 하늘이 무색해 보인다. 우리는 분화구 둘레를 걸으며 호수가 사라질세라 자꾸 내려다본다. 눈을 떼고 싶지 않다. 저 호수 빛에 반해 뛰어든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 같다. 나도 한번 뛰어들어 볼까?

 

두 시간 30분 후, 크레이터 레이크의 환상적인 물빛을 눈과 마음에 가득 담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오리건 대학이 자리 잡은 교육 도시 유진에 들러 잠시 도심을 거닐어 보고, 태평양 연안을 향해 동쪽으로 향했다. 유명한 해안 도로 101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며 오리건의 아름다운 해안을 보기 위해서다. 오리건의 해안은 같은 태평양을 접하고 있지만 북쪽의 워싱턴주 해안과 분위기가 다르다. 워싱턴 주에 비해 암석과 바위가 많아 장관을 이룬 해변이 많이 있다. 하지만 각각 번호를 매긴 해변이 197번까지 있다는데, 그 많은 해변을 다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틀 동안 101번 도로를 타고 중간중간 여러 군데 해변을 들르면서 시애틀로 돌아왔다. 해변마다 조금씩 다른 매력이 있지만, 그중 가장 좋았던 곳은 Yaquina Head Outstanding Natural Area였다. 헤드란 높이가 있는 육지가 해안에서 바다로 튀어나온 곳으로 곶(cape)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 헤드의 끝부분에 흰색으로 깨끗하게 단장한 등대가 우뚝 솟아 있다. 등대는 늘 우리로 하여금 희망과 인내, 봉사를 떠올려 겸허해지게 한다. 등대 주변은 암석으로 된 절벽이고 그 아래 바위와 암반이 바다에서 솟아올라 물새와 물개의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 그날도 스무 마리 남짓한 물개 떼가 암반에 누워 햇살을 쬐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등대가 있는 풍경이 그림엽서 같다.

 

계단을 통해 해안으로 내려가 보았다. 썰물이 빠진 후 여기저기 암반에 고인 물에 말미잘 등 각종 해양생물이 꼬물거린다. 암반을 뒤덮고 있는 뾰족한 것들은 따개비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다 홍합들이다. 작은 것부터 씨알이 꽤 굵은 것까지 온통 무리 지어 바위에 붙어 있다. 이곳이 자연 보호 구역이라서 저렇게 인간의 손길로부터 벗어나 잘 살고 있는 것이리라. 운 좋은 홍합들을 아내와 나는 사심 가득한 눈길로 쏘아 보다 왔다.

 

8일간의 자동차 여행 끝에 시애틀에 접어들면서 아내가 말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거 세 가지. 하나는 매일 온천욕을 해서 좋았던 것. 또 하나는 아이다호의 매력을 발견한 것. “

나는 이쯤에서 마지막 하나는 여행을 준비하고 내내 운전하며 수고한 남편의 몫이려니 기대하며 말을 거들었다.

“마지막 하나는?”

“햇반의 재발견. 햇반 먹어보니 좋더라. 매일 뭐 먹을까 고민도 안 하고.”

아, 이럴 수가. 이 여자에게는 남편보다 햇반이라고?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남편의 공로는 없는 거야?”

“응? 어, 그것도 넣어 줄까?”

그나마 인심 쓰듯 순순히 인정해 준다. 더 이상 따지느니 이거라도 고맙게 받는 게 낫겠다. 하기야 이번 여행 동안 계속 곁을 지켜 주고, 한 번도 투닥투닥 다투지 않고 잘 따라와 준 것만 해도 어딘가?

 

(2019. 7. 11)

 

*아래 표는 이번에 거쳐 간 오리건 주 해안 목록. 평점은 전혀 비과학적인 내 나름의 평점으로 5점 만점. ‘?’는 직접 보지 않고 지나간 곳

 

이름

주소

입장료

특징

평점

Sea Lion Caves

91560 US-101, Florence, OR 97439

일 인당 $14

개인소유지, 동굴에 바다사자 무리

?

Heceta Head Lighthouse State Scenic Viewpoint

97439 US-101, Florence, OR 97439

무료

백사장과 바다 위 바위

?

Stonefield Beach State Recreation Site

95330 US-101, Florence, OR 97439

무료

백사장

2

Neptune State Scenic Viewpoint

97439 US-101, Florence, OR 97439

무료

암석 해안

3

Thor’s Well

Yachats, OR 97498

무료

밀물 때 바닷물이 암반 틈으로 솟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음. 왼편에 Sprouting Horn

4

Seal Rock State Recreation Site

10032 NW Pacific Coast Hwy, Seal Rock, OR 97376

무료

암벽과 바다 위 기암괴석

5

South Beach State Park

Newport, OR 97366

무료

광활한 백사장

3

Yaquina Head Outstanding Natural Area

750 NW Lighthouse Dr, Newport, OR 97365

국립공원 pass 없으면 승용차 $7

등대, 아름다운 풍경, 물개 등 야생동물

5

Moolack Beach

Newport, OR 97369

무료

광활한 백사장

2

Devil’s Punchbowl State Natural Area

122 1st St, Otter Rock, OR 97369

무료

암반에 뚫린 큰 구멍으로 파도가 들이침

4

Road’s End State Recreation Site

Lincoln City, OR 97367

무료

광활한 백사장

2

Cape Kiwanda State Natural Area

33180 Cape Kiwanda Dr, Pacific City, OR 97135

무료

백사장에 차가 들어갈 수 있음. 백사장 옆에 모래 언덕

3

Rockaway Beach

111 SW 7th Ave, Rockaway Beach, OR 97136

무료

백사장, 바다 위 구멍 뚫린 쌍둥이 바위

2

Hug Point State Recreation Site

Arch Cape, OR 97102

무료

암벽 사이 백사장

4

Cannon Beach

1116 Ecola Ct, Cannon Beach, OR 97110

무료

오리건 주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 바다 위 Haystack 바위

3

아내와 내가 무릉도원이라 부르는 계곡 아래 폭포 마을

 

보이시의 강변 공원

크레이터 레이크

오리건의 해안

그날의 노을

야키나 헤드의 물개 무리 (암반 위 하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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