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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뉴스

노을 2019.10.07 15:39

평소 먼저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던 딸에게서 어느 날 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일주일 정도 지난 일이다. 아내는 곁에서 귀를 쫑긋하고 있는 내가 같이 들을 수 있도록 전화기 스피커를 켰다.

 

얼마 전 새로 시작한 직장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출퇴근 운전이 힘들지 않은지, 밥은 제대로 해 먹고 있는지 등등 자주 나누는 소소한 소재가 다 떨어지고 나서 잠시 대화가 멈추었을 때, 딸이 말했다.

“나 뉴스가 있어요.”

그 말에 그때까지 마사지 의자에 편히 기대 전화를 받던 아내가 화들짝 상체를 일으키며 큰 소리로 묻는다.

“너 애기 가졌니?”

“헤헤, 응.”

 

갑작스러운 딸의 임신 소식에 난 잠시 멍해진다. 손주가 태어난다고? 나도 이제 할아버지가 된다고?

 

예전부터 20대에 아이를 낳고 싶다던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 위한 힘들고 긴 과정을 겪어내느라 그 희망을 포기해야 했다. 딸의 나이가 벌써 만 서른넷이다. 첫아이를 낳기에 이른 나이는 아니다. 아내와 나는 딸이 서른 살에 결혼을 한 후로 언제 아이를 가질 건지 간혹 물어보았지만 그때마다 늘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제 힘든 준비 과정을 다 마치고 정식으로 전문의가 되어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아이를 가지기로 한 모양이다.

 

아기가 선 지 7주 차, 출산 예정일은 내년 5월이란다. 5월의 신부였던 딸이 결혼한 지 꼭 5년 만에 5월의 아기를 낳는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더니, 우리 가족에겐 더 아름다운 달이 되겠다. 나는 슬쩍 농담을 던진다.

“아, 아깝다. 4월에 태어난 아이가 제일 똑똑하다는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왜, 우리 애들은 다 3월인데. 애들이 어때서?”

“응? 그래, 3월이랑 5월도 괜찮지.”

“자기 생일이 4월이라고 그러는 거지? 쳇, 자기들끼리만 똑똑하대요.”

아내 생일은 7월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가끔 주위에서 손자 소식 없냐고 물어올 때마다 시큰둥했었는데, 내년이면 진짜 손주가 생기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들과 통화할 때 아들도 이제 내가 손주 볼 때가 되었다는 말로 머지않아 아기 가질 계획임을 넌지시 내비쳤었다. 그동안 남의 일로만 생각하던 손주가 어쩌면 연달아 태어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는 기분이 이럴까?

 

전화할 때 딸에게 태몽을 물어보지 않은 게 뒤늦게 생각났다. 별말이 없었던 걸 보니 특별한 꿈을 꾸진 않은 모양이다. 태몽은 부모가 대신 꾸기도 한다는데, 혹시 내가 꾸었던가? 지난 며칠의 꿈을 곰곰이 되돌려 본다. 이렇다 할 의미심장한 꿈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물어보았지만 마찬가지다. 조금 아쉽다. 그럴듯한 태몽을 꾸었으면 손주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평소 미신을 안 믿는다고 자신하던 내가 손주를 위한 태몽을 탐내는 꼴을 보니 슬쩍 웃음이 난다.

 

내 태몽은 어머니가 꾸셨다. 꿈에 우물에서 은수저들을 잔뜩 건지셨다고 했다. 요즘 들어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이 유행하는데,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은수저였다. 굳이 따지고 보면 어릴 때 우리 집은 금수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흙수저도 아니었으니 은수저가 영 틀린 말은 아니겠다. 게다가 내가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직장에서 해마다 생일 선물로 은수저를 한 벌씩 주었다. 그때 받은 많은 은수저들을 여태 보관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태몽이 그렇게 실현된 것인가?

 

내 손주가 딸에게 들어선 지 7주. 모체의 일부가 아닌 자기만의 독립된 개체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지 7주일 된 태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으며, 크기는 얼마나 될까? 그 작은 아기도 밤에는 잠을 자고 꿈을 꿀까? 아기야, 내 손주야, 이제 여덟 달 후 세상에 태어나 엄마와 아빠를 만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누리게 될 그날까지 부디 엄마 뱃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다오. 네가 태어나면 세상은 그만큼 더 빛나고 더 아름다운 곳이 될 거란다. 적어도 이 할아비의 세상은 그렇게 된단다. 너는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아니 엄마 뱃속에 네가 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이 할아비가 여태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란다. 내년 5월에 만나자꾸나. 그때 건강한 모습 보여 주렴.

 

(2019.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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