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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 가을이 깊어 간다. 나로서는 어느덧 열두 번째 맞는 시애틀의 가을인데, 올해 가을은 유독 단풍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단풍을 무심히 보아 넘겼나 보다. 올해 특별히 단풍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옛 친구 덕분이다.

 

친구는 고등학교부터 재수생 시절을 거쳐 대학까지 나와 함께 다녔다. 학창시절을 끝내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만나 우정을 지속했다. 그러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을 계기로 더 이상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는 친구다. 그 오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를 위해 시애틀에서 볼만한 곳들을 찾다가 아름다운 단풍으로 알려진 쿠보타 공원을 거기 포함시켰다.

 

지난 화요일 친구 부부를 쿠보타 공원으로 안내했다. 다른 일로 시애틀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고교 동창 부부도 동석했다. 쿠보타 공원은 마치 숨겨진 보석 같다. 20에이커의 너른 녹지에 이리저리 호젓한 오솔길이 이어져 잘 가꾸어진 나무와 잔디밭, 연못과 다리, 폭포, 바위 등 아름다운 조경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임에도 그 가치에 비해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시애틀에서 오래 산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 생소해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며칠 계속되던 가을비가 잠시 멈추었다. 구름이 약간 덮였지만 상쾌하게 갠 하늘 아래 공원은 입구에서부터 붉은 단풍으로 화장한 가을의 얼굴을 살짝 드러내 보여주었다. 지난달 와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마치 지난번에는 칼라 사진을 놔두고 흑백사진만 보고 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입구를 지나자 범종이 나타난다. 우리는 공원의 모든 존재들에게 이제 이곳에 들어감을 고하는 뜻으로 종을 몇 차례 울렸다. 그리고는 우선 큰 연못 위 언덕의 베란다로 향했다. 일본에서 석조 기술자를 초빙해 만들었다는 돌담 축대 위에 지붕이 덮인 전망대가 그것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연못 주위에도 붉은빛 잎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상록수의 초록과 대비되어 연못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공원에는 작은 폭포들과 각각 다른 크기의 연못들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몇몇 연못에는 돌다리나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변화를 준다. 그중 빨간색 난간이 돋보이는 다리 두 개가 특히 인상적인데, 하나는 교판이 반원형으로 둥글게 언덕을 이룬 ‘문 브리지(Moon Bridge)’이고 다른 하나는 평평한 ‘하트 브리지(Heart Bridge)’다. 특히 하트 브리지는 붉은 난간과 주변의 붉은 단풍이 잘 어울려 그림처럼 예쁜 모습을 만들어냈다.

 

미로처럼 갈라지고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공원을 걸으며 사방의 풍경에 마음을 뺏긴다. 곳곳에 다양한 색조의 가을 색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여름 내내 초록의 위세에 눌려 숨어 지내야 했던 빨강과 노랑, 그리고 그 사이의 미처 이름을 붙이지 못한 수많은 색깔들이 이제야 때를 만났다는 듯 나뭇잎을 물들여 존재를 과시한다. 공원 가득한 수풀에서 초록, 노랑, 주황, 주홍, 빨강 등 다채로운 색깔들이 서로 어울려 화음을 만드는 듯, 또 경쟁하는 듯 저마다 소리 높여 노래한다. 온갖 색깔의 합창이요 향연이다. 그 아름다운 조화에 눈이 반짝 뜨인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마음이 들뜬다.

 

친구가 말한다.

“전에는 단풍은 빨간색만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빨간 단풍보다 주홍빛 여러 색조로 물든 단풍이 더 멋있게 보이더라.”

아하, 그거야말로 내가 며칠 전에 동네에서 단풍을 보며 생각한 그대로가 아닌가? 나이가 들면 단풍에 대한 생각도 바뀌는 것일까? 아니면 친구와 내가 취향마저 서로 닮아가는 것일까?

 

쿠보타 공원은 쿠보타라는 일본인이 조경업을 하던 장소를 그의 사후에 시애틀 시에서 매입해 규모를 확대하고 공원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개념에 충실한 일본 정원이라기보다는 미국화한 일본 정원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 정원’으로 알려져 시애틀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선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국에서 단풍이 아름다운 곳으로는 흔히 뉴햄프셔 주를 비롯한 동북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반가운 옛 친구와 함께 거닐며 만끽하는 시애틀의 단풍이 결코 그에 못지않다.

 

함께 단풍을 즐긴 다음날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 며칠을 붙어 지내던 옛 친구와 다시 헤어진 헛헛한 마음을 달랠 겸 혼자 산행에 나섰다. 요 며칠 계속된 비로 고산지대엔 눈이 많이 쌓였을 터이므로 눈을 피해 고도가 낮은 레이크 22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주변의 나무에도 가을의 자취가 짙게 배었다. 여름 동안 길 옆에 무성했던 고사리들도 이제는 짙은 갈색으로 한 해의 일생을 마감하며 계절의 풍치를 더한다.

 

맑은 날씨에 바람마저 없으니 산꼭대기 밑의 호수는 그대로 거울이 되었다. 푸른 하늘과 건너편의 가을 숲, 그리고 저 뒤 편의 먼 산까지 다 비추어 낸다. 시애틀의 가을이 호수 속에서 깊어가는가? 호수가 시애틀의 가을을 품고 깊어가는가?

(2019. 10. 24)

쿠보타 가든 입구

문 브리지

하트 브리지

레이크 22

레이크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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