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을 보자 갑자기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머리가 몸보다 더 큰, 버블 헤드 인형 같은 모습으로 앙증맞게 쪼그려 앉은 옆모습. 이게 내 손주구나. 내 손주가 정말 세상에 나오려 준비하고 있구나.
임신 중인 딸이 초음파 사진을 보내왔다. “잘 크고 있슴다. ㅎㅎ”란 한 줄짜리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니 내 손주가 실체를 가진 구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시간도 공간도 정해지지 않은 막연한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손주였는데… 그 손주가 지금 여기 내 눈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할아비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나는 화면 가득 사진을 키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유난히 오뚝한 콧날이 눈에 띈다. 유럽계인 아빠를 닮았나 보다.
사진 속 이 아기도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까? 엄마 뱃속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며 자라고 있을까? 저를 기다리는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랑을 알기나 할까? 출산 예정인 내년 5월이 갑자기 더 멀게 느껴진다. 어서 내 품에 안아 보고 싶다.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느 쪽이건 다 좋겠다. 손자면 손자대로, 손녀면 손녀대로 나름의 좋은 점이 있을 테니까. 이 아이가 크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려면 더욱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욕과 함께 책임감이 느껴진다. 아들과 딸이 장성해 독립한 후로 아버지의 책임을 벗고 홀가분해졌는데, 이제 손주가 생겼으니 손주와 잘 놀아 주는 좋은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할 것이다.
내게 ‘다온이 아빠’라는 이름을 가져다준 딸이 이제 30여 년 만에 다시 ‘아무개 할아버지’라는 새 이름을 가져다준다. 이렇게 내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어 주는구나. 이제 인생의 3 막은 1 막과 2 막보다 더 알차게 살아 보아야겠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손주가 초음파 사진만으로도 할아비에게 새로운 의욕을 선사해 준다. 네가 세상의 빛을 볼 그날까지, 너를 내 품에 안아볼 그날까지 이 할아비는 어떻게 기다리나?
(2019.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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